‘진(秦)나라를 망하게 할 자 호(胡)라는 예언을 듣고서 변방을 막으려 만리장성을 쌓았던 진시황, 그는 진나라를 망하게 한 자 호가 아니라 그의 자식 호해(胡亥)임을 눈으로 보지 못하고 죽었으니 오히려 행복이라 하겠습니다.……’

채만식 선생의 장편소설 「태평천하」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삶의 현장이 너무도 뒤숭숭하고 혼돈스러운 시절인 것 같습니다. 언제나 시끄럽지 않은 날이 없는 것이 우리네 인간세상이라고 말들은 하지만, 요즈음처럼 온갖 극악무도하고 목불인견目不忍見인 사건들이 어느 하루도 거르지 않고 벌어졌던 시대가 언제 또 있었을까요.
부모가 자식을 태연스레 죽이지를 않나, 자식이 부모를 참혹하게 해하지를 않나, 연인끼리 흑은 이웃 사이 그리고 동기며 동료 간에, 심지어는 전혀 낯모르는 사람한테도 차마 떠올리고 싶지 않은 짓들을 서슴지 않고 자행해 버리는 세상이 아닌가요.
걸핏하면 만물의 영장이라고 떠벌리며 동물들 위에 군림하려 드는 인간이 오히려 동물보다도 못한, 아니 동물이 발가락질 하며 비웃을 행동을 아무런 죄책감도 갖지 않고 스스럼없이 저지르고 있으니 참으로 기가 막히고 매가 찰 노릇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얼굴에 철판을 깔았는지, 아전인수 격으로 제 스스로 으스대며 하는 그 ‘만물의 영장’이라는 자찬自讚이 낯부끄럽지도 않은 모양이지요.
항용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는 말로 아비지옥 같은 현실을 위로 받고 싶어 합니다만, 예의 소설 속 진시황처럼 차라리 아예 이 세상에 없다면 이런 끔찍스러운 일들을 눈으로 보지 않아도 될 것이 아닌가 하는 엉뚱한 생각까지 들 때가 한두 번이 아닙니다.
그리 살피면, 일찌감치 이 땅에 머물다 떠난 조상님들이 예전 그 땅에서 삶을 영위해 가고 있는 지금의 우리들보다 오히려 훨씬 행복하였을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불과 몇 십 년 전까지만 해도 ‘동방예의지국’이니 ‘고요한 아침의 나라’니 하면서 은근히 국격國格에 긍지와 자부심을 가졌던 우리가 어쩌다 이 지경에까지 이르고 말았는지요.
사람 사는 일이 너무도 불안하고 두렵습니다.
그리고 서글퍼집니다.